환자가 떠나고 난 뒤의 진료소 마당에는 오랜만에 깊고 평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별거미줄 새가 엘프의 어깨에 앉아 숲으로 돌아간 직후, 한소영은 진료소의 모든 공간을 철저하게 청소했다. 입원실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의사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휴식이자, 다음 환자를 맞이하기 위한 재정비의 시간이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수호석 결계 내부를 포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백색 소음만이 이따금 공터를 맴돌 뿐이었다.


소영은 오두막 외벽에 기대어 두었던 남은 목재와 무쇠 망치, 그리고 굵은 쇠못을 챙겨 들었다. 진료소의 인프라는 훌륭하게 갖춰졌지만, 외부의 야생과 맞닿아 있는 물리적인 경계선, 즉 마당의 울타리 주변은 아직 허술한 곳이 많았다. 수호석의 보이지 않는 장막이 짐승들의 감각을 흩뜨려 준다고는 하나, 눈먼 동물이 무작정 달려들거나 강한 비바람에 덤불이 꺾여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바리케이드가 필수적이었다.


“이참에 느슨해진 울타리부터 튼튼하게 손봐야겠어.”


그녀는 진료소 마당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기존에 엉성하게 꽂아두었던 나뭇가지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흙이 무르게 파여 기둥이 흔들리는 곳이나, 가지가 얇아 쉽게 부러질 것 같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소영은 무쇠 망치를 쥐고, 미리 적당한 길이로 잘라둔 튼튼한 통나무 기둥들을 바닥에 수직으로 세웠다.


깡! 까앙! 깡!


경쾌하고 일정한 망치질 소리가 맑은 공기를 갈랐다. 못을 박는 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타격으로 기둥 자체를 흙 속 깊숙이 밀어 넣는 소리였다. 그녀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질긴 칡넝쿨을 여러 겹으로 단단히 엮어 그물처럼 팽팽한 지지대를 만들었다. 칡넝쿨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여분의 잔가지들을 덧대어 묶음으로써, 소형 동물들이 함부로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틈새를 촘촘하게 메웠다.


육체노동은 고단했지만, 뼈를 맞추고 살을 꿰매는 외과 수술의 극도에 달한 긴장감에 비하면 차라리 평화로운 산책에 가까웠다.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몸에 기분 좋은 열기가 돌았다.


“이쪽은 됐고. 다음은 남쪽 경계.”


한 시간 남짓 마당 주변을 맴돌며 보수 작업을 마친 소영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땅에 뿌리를 내린 울타리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울타리 보수를 끝낸 뒤, 그녀는 나무 진찰용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의료 도구를 정비할 차례였다. 그녀는 맑은 개울물을 담은 나무통과, 표면이 아주 곱고 매끄러운 평평한 숫돌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3단 의료용 선반에서 그동안 수술에 사용했던 마법 뼈칼과, 최근에 별거미줄 새의 깃털을 가공해 만든 초정밀 광물 메스를 조심스럽게 꺼내왔다.


“언제 또 큰 환자가 올지 모르니까, 장비는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 해.”


소영은 숫돌 위로 물을 가볍게 몇 방울 흩뿌렸다.


먼저 뼈칼의 자루를 쥐고, 칼날의 각도를 숫돌 표면에 비스듬하게 맞췄다. 그리고 일정한 힘과 속도로 칼날을 밀어내며 연마를 시작했다.


스윽, 스으윽.


매끄러운 돌과 단단한 뼈가 마찰하며 내는 서늘한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여러 번의 수술과 잦은 목공 작업의 보조 도구로 사용되면서 칼날 끝이 미세하게 둔해져 있었으나, 정성스러운 연마가 반복되자 이내 원래의 날카롭고 예리한 곡선을 되찾기 시작했다.


소영은 엄지손가락의 지문을 이용해 칼날의 표면을 아주 가볍게 스쳐보며 절삭력을 촉각으로 점검했다. 피부의 겉면에 닿는 순간 서늘하게 파고드는 완벽한 감각. 뼈칼의 정비가 끝났다.


다음은 초정밀 광물 메스였다.


이 광물은 일반적인 금속이나 뼈와 달리, 숫돌에 강하게 갈아내기보다는 부드러운 가죽에 문질러 표면의 미세한 불순물만 닦아내어도 본래의 압도적인 예리함을 유지하는 특성이 있었다. 소영은 깨끗한 펠트 가죽 조각을 꺼내어, 투명하고 푸른빛이 도는 메스의 날을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햇빛을 받은 광물 메스가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하게 빛났다.


정비를 마친 도구들을 깨끗한 무명천으로 감싸 다시 선반의 제자리에 올려두고 나니, 어느덧 해가 하늘 한가운데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의 여유. 진료소 마당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마당 한쪽의 개방형 파빌리온 안에서는 그림자 갈기 늑대가 푹신한 가죽 침상 위에 거대한 몸을 웅크린 채 평화로운 낮잠을 자고 있었고, 통나무 오두막의 처마 밑 그늘에서는 새끼 여우가 배를 하늘로 뒤집고 누워 네 발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 평온한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영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다들 잘 자네. 그러고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질 시간이구나.”


오늘따라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해야 할 긴급한 처치도 없었다. 소영은 새로운 환자가 찾아오기 전, 이 짧고 달콤한 휴식 시간을 자신과 짐승들을 위한 풍성한 만찬으로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진료소 뒤편 그늘진 곳에 설치해 둔, 천연 백색 점판암으로 둘러싸인 지하 저장고의 나무 뚜껑을 열었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한겨울의 동굴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냉기가 훅 끼쳐왔다. 지하의 차가운 암석층 덕분에 저장고 내부는 완벽한 천연 냉장고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쪽 깊숙한 곳에서, 며칠 전 그림자 갈기 늑대가 숲에서 사냥해 왔던 크고 묵직한 산짐승 고기 덩어리를 꺼냈다.


고기는 부패의 기운이나 상한 냄새가 전혀 없이, 붉고 선명한 육색과 단단한 육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쪽에 정갈하게 모아둔 야생 감자들도 서너 개 챙겨 들었다.


저장고 문을 닫고 화덕 앞으로 돌아온 소영은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먼저 마른 장작들을 화덕 안에 얼기설기 쌓아 올리고, 부싯돌을 쳐서 불씨를 만들었다. 건조한 장작은 금세 타닥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붉은 불꽃을 뿜어냈다. 소영은 무쇠 팬을 불 위에 올렸다. 팬이 달아오르는 동안, 광물 메스로 산짐승 고기의 결을 따라 두툼하고 큼직하게 살코기를 썰어냈다.


팬이 충분히 뜨거워지자, 소영은 고기의 지방 부위를 먼저 잘라 팬의 표면에 넓게 문질렀다.


치이이익—.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고소한 기름이 녹아 나오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영은 그 위로 두툼하게 썰어둔 붉은 고기 조각들을 거침없이 얹었다. 고기의 겉면이 순식간에 진한 갈색으로 익어가며, 풍부한 육즙이 팬 위에서 끓어올랐다.


여기에 흙을 깨끗이 씻어내고 투박하게 썰어둔 야생 감자들을 고기 주변의 빈 공간에 둘러 담았다. 고기에서 흘러나온 육향 가득한 기름이 감자의 표면에 스며들어 노릇하게 튀겨지듯 구워지기 시작했다.


소영은 인간 마을에서 귀하게 구해온 마 자루를 열어, 굵은소금과 말린 허브, 그리고 거칠게 으깬 후추 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그것을 지글거리는 고기와 감자 위로 골고루 흩뿌렸다.


열기를 타고 후추의 알싸한 향과 허브의 향긋함, 그리고 짙고 기름진 육향이 폭발하듯 섞여 공터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압도적인 냄새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처마 밑에서 자고 있던 새끼 여우였다. 녀석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진원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화덕 근처에 도착해서야 눈을 번쩍 뜬 새끼 여우는, 침을 뚝뚝 흘리며 소영의 다리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뒤이어, 파빌리온에서 잠을 자고 있던 그림자 갈기 늑대 역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녀석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소영의 곁에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무쇠 팬 위에서 익어가는 만찬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야생의 정점 포식자조차도 인간이 불과 향신료를 다루어 만들어내는 이 압도적인 요리의 연성 앞에서는 얌전한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 겉은 바싹 익히고 속은 촉촉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소영이 나무 집게를 이용해 고기들을 능숙하게 뒤집으며 말했다.


막 감자가 포슬포슬하게 다 익어갈 무렵이었다.


수호석 결계가 처진 숲의 동쪽 가장자리 부근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붉은 털에 하얀 무늬가 섞인 우아한 자태의 어미 여우가 양치식물 잎사귀 사이를 헤치며 마당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미 여우는 진료소를 처음 발견하고 자신의 새끼를 맡겼을 때의 그 날카롭고 경계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구운 고기의 향기에 이끌려 걸음을 멈칫하긴 했지만, 시선은 부드러웠고 꼬리는 편안하게 내려가 있었다.


새끼 여우가 가장 먼저 엄마의 냄새를 맡고 꼬리를 풍차처럼 흔들며 결계 쪽으로 달려갔다. 어미 여우는 반갑게 달려오는 새끼의 얼굴을 혀로 핥아주며 진료소 마당 안으로 자연스럽게 발을 들였다.


“오늘은 병실도 비었으니까 다 같이 맛있는 거나 실컷 먹자. 잘 오셨어요.”


소영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화사한 얼굴로 어미 여우를 환영했다.


어미 여우는 가볍게 콧김을 뿜어내며 소영을 향해 긍정의 파동을 보냈다. 거대한 그림자 갈기 늑대가 화덕 옆에 버티고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미 여우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털을 곤두세우지 않았다. 이 마당의 규칙 안에서는 그 어떤 맹수도 타인을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체득한 덕분이었다.


소영은 오두막 안에서 평평하고 넓은 나무 그릇 여러 개를 꺼내왔다.


가장 크고 속이 깊은 통나무 그릇에는 그림자 갈기 늑대의 몫으로 큼직한 살코기 조각들을 수북하게 담아내었다.

새끼 여우와 어미 여우를 위해서는 비교적 부드럽고 씹기 편한 부위들을 작게 썰어, 고소한 기름에 완벽하게 구워진 야생 감자들과 함께 덜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소영 자신의 몫을 작은 나무 접시에 담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옅은 붉은빛이 도는 완벽한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산짐승 고기와, 포크를 대기만 해도 부드럽게 부서지는 감자구이였다.


그녀는 화덕 곁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자신의 곁에 둘러앉아 평화롭게 식사를 즐기는 짐승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늑대는 뼈째로 고기를 씹어 넘기며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고, 어미 여우와 새끼 여우는 고기 육즙이 배어든 감자를 핥아먹으며 연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소영은 자신이 깎아 만든 나무 꼬치로 고기 한 점을 찔러 입에 넣었다. 소금의 짭조름한 맛과 후추의 강렬한 향이 진한 육향과 함께 혀끝에서 기분 좋게 부서졌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과 배를 채우는 온기, 그리고 위험천만한 야생의 숲 한가운데서 피식자와 포식자가 인간을 중심으로 모여앉아 만들어내는 이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하고 느릿한 일상의 한 장면. 소영은 천천히 고기를 씹어 넘기며 맑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밀려드는 평화로움이 고단했던 근육의 피로를 다정하게 씻어내리고 있었다.


🏥 현재 진료소 상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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