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이세계 숲속 동물병원 (5화: 뿔 오소리의 보은과 인간 마을로의 첫 여정)

 -1-


햇살의 각도가 기울어지며 오두막 앞 공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어졌다. 소영은 쭈그려 앉은 채 뾰족하고 납작한 돌멩이를 쥐고 바닥을 긁어내고 있었다.


돌끝이 흙바닥을 파고들 때마다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났다. 뿔 오소리의 상처를 씻어내며 흘러내린 핏물, 괴사한 조직의 파편, 그리고 누런 고름이 흙과 엉겨 붙어 검붉은 진흙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냄새는 소독액의 알코올 향이 날아가자마자 다시 비릿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파리나 벌레가 꼬이면 다른 감염원이 돼. 오소리가 깨기 전에 이 주변부터 치워야겠다.”


소영은 돌을 모종삽처럼 사용해 오염된 흙을 깊숙이 파냈다. 표면의 흙뿐만 아니라, 핏물이 스며든 아래쪽의 축축한 층까지 전부 긁어모았다. 넓은 양치식물 잎사귀를 옆에 깔아두고, 파낸 흙더미를 그 위로 조심스럽게 옮겨 담았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저릿하게 당겨왔지만, 그녀는 딱딱하게 팔을 움직였다. 이계의 숲에서 감염 통제는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오염된 흙을 모두 잎사귀에 담은 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오두막 뒤편의 양지바른 곳으로 걸어갔다. 깊게 구덩이를 파고 흙더미를 쏟아부은 후, 주변의 마른 흙과 돌로 단단하게 덮어버렸다. 파리 떼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밀봉한 것이다.


손을 털며 돌아온 소영은 문설주 쪽으로 다가갔다. 어제 매달아 두었던 야생 쑥 다발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독약이 다 떨어졌어. 이 쑥이 제대로 말랐는지 테스트해 봐야겠다. 즙을 내거나 달일 방법을 찾아야 해.”


소영은 까치발을 들고 쑥 다발의 가장자리에 있는 잎 하나를 떼어냈다. 손가락 끝으로 비벼보자, 겉면은 바스락거리며 부서졌지만 중심부의 잎맥에는 아직 질긴 수분기가 약간 남아 있었다. 코끝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자 쌉싸름하고 짙은 허브 향이 폐부를 찔렀다. 알코올만큼의 즉각적인 살균력은 없겠지만, 끓는 물에 진하게 달여내면 훌륭한 천연 항균제가 될 것이다.


곁에서 그녀의 바짓단을 맴돌던 새끼 여우가 코를 킁킁거렸다.


“누나, 그거 먹는 거야? 아까보다 덜 쓴 냄새 나.”

“아니, 이건 상처에 바를 약이야. 네 다리에 바른 연고랑 비슷한 역할을 할 거라고.”


소영이 남은 잎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대답했을 때였다. 간판 기둥 아래에서 낮고 규칙적이던 짐승의 숨소리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소영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뿔 오소리가 얕은 숨을 내쉬며 앞발을 뻗어 바닥을 긁고 있었다. 감겨 있던 탁한 눈동자가 천천히 열렸다. 아직 초점이 완전히 맞지 않아 허공을 응시하던 오소리는, 곧 머리에 감긴 하얀 붕대의 이질적인 감촉을 깨달은 듯 고개를 아주 느리게 흔들었다.


머릿속으로 얕은 숨소리와 같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뜨거운 것이, 사라졌다.)


아까 소영의 뇌리를 강타했던 그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굉음이 아니었다. 열기가 식은 젖은 흙바닥처럼 서늘하고 묵직한 안도감이 감각의 형태로 흘러들어왔다. 오소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뒷다리가 약간 휘청거렸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기에 균형을 잡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오소리의 시선이 소영에게 향했다.


(네가 내 피를 멎게 하고, 벌레를 쫓아냈군.)

“응. 다행히 감염이 더 퍼지기 전에 소독을 끝냈어. 며칠은 그 하얀 천을 풀지 마.”


소영은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오소리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주둥이 끝의 작은 뿔을 땅을 향해 살짝 내렸다. 야생의 포식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이자 굴복의 표시였다.


(내 둥지로 돌아가겠다. 하지만 이 빚을 진 채로 갈 수는 없지. 잠시만 기다려라.)


오소리는 몸을 돌려, 올 때보다 훨씬 안정적인 걸음걸이로 고사리 군락 사이를 파헤치며 사라졌다. 잎사귀가 흔들리며 닫히는 소리만이 숲의 고요함 속에 남았다.


“…기다리라니. 뭘 주려고?”


소영은 멍하니 오소리가 사라진 덤불을 바라보았다. 고기를 물어다 준 어미 여우처럼 또 다른 사냥감을 가져오려는 것일까. 그녀는 화덕 옆의 나무 토막에 앉아 기다렸다. 삼십 분 남짓 지났을까, 다시 덤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소리가 돌아왔다. 입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 대신, 흙투성이의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오소리는 소영의 발치에 그것을 툭 뱉어냈다. 달그락, 하는 단단한 마찰음이 났다. 소영이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그녀의 눈이 커졌다. 성인 여성의 엄지손가락 첫 마디만 한 크기의, 거칠게 깎인 다면체의 돌이었다. 아니, 평범한 돌이 아니었다. 겉면에 묻은 진흙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자, 반투명하고 영롱한 푸른빛이 석양을 받아 부서져 나왔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었지만, 내부에서 미세하게 빛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기묘한 굴절률을 가지고 있었다. 사파이어나 아쿠아마린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차갑고 단단한 무게감이 손바닥을 짓눌렀다.


(땅속 깊은 곳, 물이 마르지 않는 동굴에서 주운 것이다. 내겐 예쁜 돌멩이에 불과하지만, 두 발로 걷는 자들은 이런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소영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보석과 오소리를 번갈아 보았다. 동물이 인간의 화폐 가치를 이해하고 지불하다니. 이 숲의 생태계는 그녀가 알던 생물학적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건… 너무 지나친 답례인데. 내가 쓴 약은 이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내 목숨의 값이다. 그것이 더 가벼울 리 없지.)


단호한 울림이었다. 소영은 보석의 차가운 표면을 꽉 쥐었다.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이 긍지 높은 짐승을 모욕하는 일일 터였다. 그리고 솔직해지자면, 지금 그녀에게는 자존심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 보석은 생존을 넘어, 그녀가 이 세계의 문명과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었다.


“…고마워. 정말로 유용하게 쓸게.”


소영은 보석을 청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허벅지를 누르는 딱딱한 질감이 기막힌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시 오소리를 마주 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입 안을 맴돌았다.


“저기, 오소리야. 혹시… 인간의 마을은 여기서 얼마나 걸어가야 나오는지 알아?”

오소리의 귀가 미세하게 쫑긋거렸다. 탁한 눈동자가 해가 지고 있는 서쪽과, 그 반대편 동쪽을 번갈아 향했다.


(네 걸음으로 말인가? 인간들은 다리가 길지만, 숲의 흙을 밟는 법을 모른지.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저기 나무 반대편으로 떨어질 때까지 걸어야 한다.)


오소리의 감각과 함께 머릿속에 태양의 궤적이 그려졌다. 정오에서 늦은 오후 무렵까지의 시간.


“다섯 시간… 대략 다섯 시간 정도 걷는 거리구나.”

(동쪽이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숲의 냄새가 옅어지고 연기 냄새가 나는 곳이 나온다. 거기가 네 동족들의 영토다. 나는 이제 가겠다. 고마웠다, 털 없는 치유자여.)


오소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이번에는 정말로 숲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소영은 간판 아래에 홀로 섰다. 해가 완전히 나무 뒤로 넘어가며, 숲은 빠른 속도로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한층 서늘해졌다.


“다섯 시간. 왕복 열 시간….”


소영은 주머니 속의 보석을 매만졌다. 지금 출발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숲의 밤은 어떤 포식자가 배회할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면, 정오 무렵에는 인간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당장 필요한 게 산더미야.”


소영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화덕에 나뭇가지를 더 던져 넣었다. 불꽃이 타오르며 붉은빛이 낡은 통나무 벽을 비췄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잿더미 근처의 평평한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선을 그어가며 머릿속의 목록을 물리적인 형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의복. 그녀가 입고 있는 흰 블라우스는 이미 걸레나 다름없었고, 찢어낸 소매 때문에 찬 바람이 그대로 스며들었다. 활동하기 편하고 튼튼한 옷과 신발이 필요했다.

둘째, 의료용품. 끓인 물과 쑥만으로는 중증 감염이나 대형 수술을 감당할 수 없다. 깨끗한 무명천, 바늘과 실, 상처를 봉합할 때 쓸 만한 도구, 알코올을 대체할 만한 독한 술.

셋째, 보존 식량과 조리 도구.

넷째, 숲의 밤을 밝힐 조명. 램프나 양초.


“보석 하나로 이걸 다 살 수 있을까? 여기 물가를 모르니… 바가지를 쓸지도 몰라.”


소영은 흙바닥에 적어놓은 기호들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취업 난이도를 고민하던 서울의 수의대생이, 이제는 이세계의 숲에서 짐승에게 받은 보석을 들고 시장 물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누나, 나 두고 갈 거야?”


건초 더미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새끼 여우가 불안한 듯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물었다. 소영은 흙이 묻은 손을 무릎에 문질러 닦고는 다가가 여우의 턱밑을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아니. 넌 아직 다리가 다 안 나았잖아. 다 나을 때까지는 내가 널 돌봐줘야지. 내일 아침에 금방 다녀올게. 엄마가 널 데리러 오기 전에는 돌아올 거야.”


새끼 여우는 그제야 안심한 듯 소영의 손바닥에 코를 부비며 꼬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화덕의 불길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소영은 오두막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을 등진 채 건초 더미 위에 누웠다. 주머니 속의 보석이 차갑게 허벅지를 눌렀다. 내일 펼쳐질 인간 세계와의 첫 조우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상상하며 잠을 청했다.


-2-


여명의 푸르스름한 빛이 오두막의 통나무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소영은 눈을 떴다. 관절 마디마디에 젖은 모래가 끼어 있는 것처럼 뻐근했다. 건초 더미 위에서 몸을 뒤척이자, 그녀의 허벅지 부근에 몸을 말고 자던 새끼 여우가 얕은 숨소리를 내며 귀를 움찔거렸다. 소영은 여우가 깨지 않도록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발바닥에 닿는 흙바닥의 냉기가 수면의 잔여물을 단숨에 앗아갔다.


어제저녁에 피워두었던 화덕의 불은 옅은 회색 재만 남긴 채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주석 냄비로 다가갔다. 어젯밤 남겨두었던 세 귀 토끼의 고기 스튜는 밤새 서늘한 공기에 식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국물 위로 하얀 지방층이 두껍게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울의 삶이었다면 당장 싱크대에 쏟아버렸을 시각적 질감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뇌는 그것을 '버려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열량’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소영은 밖으로 나가 어제 채취해 두었던 넓은 양치식물 잎사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개울물에 잎을 씻어 물기를 탁탁 털어낸 뒤, 냄비 안의 굳은 고기 덩어리와 지방질을 식칼의 등 부분으로 긁어모아 잎사귀 한가운데에 올렸다.


“어제 끓여둔 고기 남은 거라도 좀 챙겨야겠어. 5시간이면 가다가 배고플 테니까.”


혼잣말은 건조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잎사귀를 여러 번 접어 고기를 완전히 밀봉한 뒤, 얇고 질긴 넝쿨줄기로 단단히 십자 매듭을 지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녹색 꾸러미가 완성되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청바지 안감 너머로 뿔 오소리가 주고 간 푸른빛의 원석이 차갑고 단단하게 만져졌다. 이 돌멩이 하나에 오늘 하루의, 어쩌면 앞으로 몇 주간의 생존이 걸려 있었다. 소영은 낡은 가죽 신에 발을 꿰어 넣고, 문설주에 매달린 쑥 다발이 무사한지 한 번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오두막의 문을 닫았다.


끼익, 하는 경첩 소리 너머로 숲의 아침이 그녀를 맞이했다.

오소리가 알려준 방향은 동쪽,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었다. 소영은 오두막 근처의 작은 개울이 흘러가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숲의 내부는 고요했지만, 그건 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뭇잎에서 이슬이 떨어져 흙에 스며드는 소리, 이름 모를 벌레들이 날개를 비비는 진동, 수관 위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새의 지저귐. 소영은 헐렁한 가죽 신의 밑창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아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한 발 한 발 발끝부터 조심스럽게 땅에 디디며 전진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을 가린 거대한 나무들 때문에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저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기둥의 각도가 조금씩 가파르게 세워지고, 숲의 서늘했던 공기가 점차 끈적하고 후덥지근하게 데워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뿐이었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개울의 폭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얕은 웅덩이 수준이었던 물길은 어느새 성인 여성의 무릎 높이까지 찰랑거리는 작은 하천으로 변해 있었다. 허벅지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오고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소영은 이끼가 잔뜩 낀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품에서 잎사귀 꾸러미를 풀었다. 하얗게 굳어 있던 지방질은 체온과 대기의 온도에 미세하게 녹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차가운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질기고 누린내가 났지만, 그녀는 딱딱하게 턱을 움직여 씹어 삼켰다. 목이 메어올 때마다 하천의 물을 손으로 떠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터지기를 반복하며 감각이 둔해질 무렵, 주변의 풍경이 미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둘레가 세 아름은 족히 되던 거대한 고목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대신 사람의 허리 굵기만 한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땅바닥을 덮고 있던 축축한 부엽토와 썩은 나무뿌리 대신, 단단하게 다져진 흙길의 흔적이 나타났다.


그리고 냄새가 달라졌다.

흙과 물이끼, 식물의 수액이 뿜어내던 짙은 녹색의 냄새가 옅어지고, 대신 마른 나무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연기 냄새, 그리고 가축의 분뇨가 뒤섞인 구린내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소영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굵은 참나무의 줄기 뒤로 몸을 숨겼다. 수관이 얇아진 틈으로 쏟아지는 직사광선이 눈을 부시게 했다. 나무줄기 너머로 시선을 빼꼼 내밀자, 숲의 경계가 끝나는 지점에 탁 트인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평지 위로 드문드문 돌과 나무로 지어진 단층 건물들이 보였고, 그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의 형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소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인간이었다. 이세계에 떨어져 처음으로 목격하는 동족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가장 가까운 흙길 쪽을 주시했다. 짐수레를 끄는 두 명의 남자가 그녀가 숨어 있는 숲의 경계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짐승은 소와 비슷했지만 어깨에 두꺼운 혹이 솟아 있었다.


남자들이 수레를 세우고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봐, 축에 기름칠 좀 다시 해야겠어. 바퀴가 자꾸 헛도네.”

“그러게 출발하기 전에 조합에 들르자고 했잖아. 쯧, 엘프 놈들 숲 근처라 그런지 공기가 습해서 나무가 금방 부푼단 말이야.”


소영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뇌가 멈칫했다. 남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분명 그녀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기묘한 발음과 억양이었다. 마찰음이 많고 거친, 투박한 언어. 그런데 그 소리가 고막을 통과해 뇌에 닿는 순간, 완벽하고 매끄러운 한국어의 의미망으로 직역되어 머릿속에 꽂히고 있었다.


“다행히 한국어… 아니, 말이 통하는 건가? 아니면 이것도 내 능력인가?”


동물과 의사소통이 되던 그 기현상과 같은 원리일지도 몰랐다. 원리가 무엇이든 간에, 언어의 장벽이 없다는 사실은 소영의 척추를 짓누르던 거대한 공포의 절반을 덜어내 주었다.


남자들이 수레를 끌고 다시 멀어지자, 소영은 나무 뒤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꼴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하얬을 블라우스는 소매가 찢겨 나가고 핏자국과 흙물로 갈색이 되어 있었다. 청바지 무릎은 풀물이 들어 초록색이었고, 발에 맞지 않는 낡은 가죽 신은 진흙투성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는 모닥불 연기와 짐승의 피 냄새가 났다.


어느 모로 보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기어 나온 조난자, 혹은 최하층 빈민의 몰골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당당하게 걷자.”

소영은 어깨를 펴고 숲의 경계를 넘어 마을의 흙길로 들어섰다.


마을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변방의 작은 촌락을 생각했지만, 길게 뻗은 중앙 도로 양옆으로는 상점의 간판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고,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복장은 중세 유럽과 비슷한 거친 마직물 튜닉이나 가죽옷이 주를 이루었다.


소영이 도로를 걷기 시작하자, 곁을 지나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 피하는 발걸음, 이따금씩 들려오는 수군거림.


“세상에, 저 꼴 좀 봐. 마수한테라도 쫓긴 건가?”

“가까이 가지 마. 냄새나.”


소영은 턱에 힘을 주고 앞만 보며 걸었다. 타인의 시선이 피부를 찌르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그녀의 눈은 상점들의 간판을 바쁘게 훑고 있었다. 빵집, 푸줏간, 천을 파는 옷가게, 대장간. 그리고 마침내 중앙 광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찾던 문양을 발견했다.


거대한 저울 양옆으로 빛나는 보석과 동전이 조각된 무거운 나무 간판. 창문은 두꺼운 유리로 막혀 있었고, 건물 자체도 다른 상점들에 비해 훨씬 견고한 돌로 지어져 있었다. 전당포 혹은 보석 감정소일 확률이 높았다.


소영은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훅 끼쳐오는 냄새가 숲의 그것과는 완벽히 대비되었다. 윤이 나게 닦인 목재의 냄새, 값비싼 밀랍 향, 그리고 금속 특유의 차가운 냄새.


내부는 넓고 정돈되어 있었다. 허리 높이의 매끄러운 오크나무 카운터가 길게 놓여 있었고, 그 뒤쪽 벽면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서랍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한쪽 눈에 둥근 확대경(루페)을 끼고 양피지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던 초로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시선이 소영의 헝클어진 머리에서부터 핏자국이 남은 찢어진 블라우스, 흙투성이 가죽 신까지 빠르게 훑어 내렸다.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동냥을 하러 온 거라면 길을 잘못 찾았소. 여긴 뒷골목 구호소가 아니야.”

차갑고 사무적인, 노골적인 축객령이었다.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천천히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더러운 손을 매끄러운 목재 위로 올리는 대신,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돌멩이의 감촉을 확인한 뒤, 그것을 꺼내어 카운터 위에 덮인 검은 비단 천 위로 툭 내려놓았다.


달그락.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 구르는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울렸다.

“동냥하러 온 거 아닙니다. 감정을 의뢰하러 왔죠.”


소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끝은 떨리지 않았다. 남자는 코웃음을 치려다, 비단 천 위에서 푸른빛을 난반사하는 돌멩이를 보고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멈칫했다.


남자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깃펜을 내려놓고, 서랍에서 은색 핀셋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돌멩이를 집어 올렸다. 한쪽 눈에 낀 확대경을 들이밀고는, 돌의 단면과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미세한 빛의 굴절을 뚫어지게 살폈다.


“이건….”

남자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졌다.


“정제되지 않은 원석이군. 하지만 내부의 마나 응집도가 놀라울 정도로 높소. 짙은 수 속성의 마력석이야. 겉면에 묻은 흙을 보아하니 채굴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도대체 이런 걸 어디서 났소?”


의심과 탐욕이 뒤섞인 날카로운 시선이 확대경 너머로 소영을 향했다.

“주웠습니다. 숲의 깊은 곳에서.”

소영은 무표정하게 거짓말을 섞었다.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요. 상인은 물건의 가치만 판단하면 될 텐데요. 얼마나 쳐줄 수 있습니까?”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핀셋을 내려놓았다. 상대가 행색은 거지 같아도 만만한 풋내기가 아님을 직감한 듯, 장사꾼 특유의 능글맞은 가면을 썼다.


“뭐, 출처야 묻지 않는 게 이 바닥의 상도덕이지. 가공비가 꽤 들겠지만, 원석 자체의 순도가 높으니… 8골드 정도 쳐주겠소.”


골드. 금화라는 뜻이다. 하지만 8골드가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 소영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서 덥석 수락했다가는 바가지를 쓸 것이 뻔했다. 소영은 턱을 긁적이며 태연한 척 되물었다.


“8골드라. 그걸로 이 마을에서 빵을 몇 개나 살 수 있죠?”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보쇼 아가씨. 8골드면 이 마을 뒷골목의 빵집을 넉 달 치 밀가루 통째로 사들일 수도 있는 돈이오. 일반적인 평민 가족이 반년은 먹고살 수 있는 거액이란 말이오. 그 정도면 대답이 됐소?”


소영의 심장이 갈비뼈 안쪽에서 쿵, 하고 크게 뛰었다.

그 오소리가 준 것은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명줄이었다. 반년을 먹고살 수 있는 돈. 그것도 후려친 가격이 그 정도라면, 이 돌의 진짜 가치는 더 높을 것이다. 소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반년이라. 목숨을 걸고 숲에서 가져온 것치고는 약간 아쉬운 액수네요. 10골드로 합시다. 그럼 여기서 거래를 마치죠. 아니면 다른 감정소를 찾아보고요.”


소영은 다시 카운터 위의 원석을 집어 들려는 시늉을 했다. 남자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잠깐, 잠깐! 성미도 급하군. 알았소, 알았어. 특별히 10골드에 쳐주겠소. 대신 수수료는 따로 떼지 않겠소.”


남자는 금고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눈이 부시도록 노란빛을 발하는 금화 9개와, 그보다 작은 은화 여러 닢을 세어 카운터 위에 늘어놓았다.


“1골드는 10실버로 환전해서 주겠소. 지금 그 행색을 보아하니 당장 잔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하는 배려요.”


찰그랑, 하는 금속음과 함께 차가운 금화와 은화가 소영의 흙투성이 손바닥 안으로 쏟아졌다. 그 물리적인 무게감이 비로소 그녀를 이 세계의 현실 위에 단단히 두 발로 서 있게 만들었다. 동물의 언어를 듣고, 마력석을 팔아 금화를 얻었다. 이 모든 것이 미치도록 비현실적이었지만, 손안의 금속은 차갑고 단단한 진짜였다.


“고맙습니다.”

소영은 돈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카운터를 돌아 전당포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그녀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근처에 옷을 살 만한 곳과, 약재를 취급하는 곳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주머니 속에 돈이 생기자,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계획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오두막을 진료소로 꾸미기 위해 당장 필요한 물품들의 목록. 깨끗한 천, 바늘, 소독용 술, 그리고 자신을 지킬 튼튼한 옷과 부츠. 생존을 위한 쇼핑이 시작될 참이었다.

🏥 현재 진료소 상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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