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이세계 숲속 동물병원 (6화: 엘프와의 조우, 그리고 숲의 치유자)

 보석 감정소의 무거운 나무 문을 닫고 나오자, 정오의 햇살이 소영의 정수리를 정통으로 내리꽂았다.


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흙먼지가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여 정강이 높이까지 뿌옇게 피어올랐고, 어디선가 무쇠를 두드리는 둔탁한 망치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소영은 주머니 속으로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끝에 닿는 은화들의 차갑고 딱딱한 테두리가 그녀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이 비참한 행색이었다.


그녀는 길을 따라 걷다 천 조각들이 줄지어 널려 있는 상점을 발견했다. 매대에 쌓인 옷감에서는 짐승의 가죽을 무두질할 때 나는 시큼한 냄새와 덜 마른 아마의 풋내가 났다. 상인은 소영의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가 손바닥 위에 은화 한 닢을 올려놓자 금세 입가에 장사꾼의 미소를 지었다.


소영은 가장 튼튼해 보이는 짙은 갈색의 마직물 튜닉과 활동하기 편한 품 넓은 바지, 그리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투박한 가죽 부츠를 골랐다. 상점 뒤편의 좁은 창고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하얀 블라우스를 벗어 내릴 때, 말라붙어 있던 천이 피부에서 떨어지며 따끔거렸다. 새 튜닉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자 거친 직물의 질감이 맨살을 쓸어내렸다. 섬유유연제의 부드러움 따위는 없는, 피부를 갈아내는 듯한 억센 감촉.


가장 큰 변화는 신발이었다. 물집이 터져 진물이 흐르는 발에 거친 무명 양말을 신고 가죽 부츠에 발을 밀어 넣었다. 새 가죽이 발등을 강하게 압박해 왔지만, 적어도 바닥의 뾰족한 돌멩이나 나뭇가지가 직접 살을 파고들 일은 없었다. 그녀는 벗어둔 블라우스와 찢어진 청바지, 낡은 가죽 신을 상점 구석의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던져 넣었다. 서울의 수의대생 한소영을 증명하던 마지막 허물이 버려지는 순간이었다.


상점을 나서자 발걸음이 한결 묵직해졌다. 두 번째 목표는 굶주린 위장을 채우고 숲으로 돌아갈 보존식을 구하는 것이었다.


바람을 타고 구운 고기의 기름진 냄새와 홉이 발효되는 시큼한 냄새가 날아왔다. 냄새의 근원지는 낡은 오크통을 간판 대신 매달아 둔 주점이었다. 한낮임에도 내부는 어둑했고,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 잔을 부딪치며 떠들고 있었다. 소영은 구석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다가온 종업원에게 은화 한 닢을 건네며 식사와 물통, 그리고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마른 빵과 육포를 넉넉히 주문했다.


잠시 후, 뚝배기 같은 그릇에 담긴 묽은 고기 스튜와 성인 남성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큼 거대한 호밀빵이 나왔다. 스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향신료 냄새가 훅 끼쳤다. 소영은 나무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크게 떠넘겼다. 입천장이 델 듯이 뜨거웠고, 엄청나게 짰다.


하지만 몸의 세포들은 그 소금기를 미친 듯이 흡수했다. 그녀는 딱딱한 빵을 손으로 뜯어 스튜에 푹 적신 뒤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턱관절이 뻐근해질 정도로 질긴 빵이었지만, 아침에 개울가에서 삼켰던 식은 토끼 고기의 지방 덩어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허겁지겁 그릇을 비워갈 무렵, 주점의 상인이 빈 맥주통을 굴리며 테이블 옆을 지나갔다. 앞치마에 기름때가 전 상인이었다. 소영은 입술에 묻은 국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이 근처 숲에 대해 좀 물어볼 수 있을까요? 상인들이나 사냥꾼들이 안쪽까지 들어가는 편입니까?”


그녀의 말투는 의도적으로 투박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이방인의 티를 내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상인은 빈 통을 세워두고 더러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소영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쯧, 숲 안쪽 깊은 곳은 들어가지 않는 게 상책이야. 요즘 들어 짐승들 움직임이 사납다니까.”

상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저기 엘프 놈들이 살고 있는 서쪽 끝자락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쪽 경계림도 마찬가지요. 나무꾼들도 해가 지기 전에는 무조건 밖으로 나와. 밤이 되면 눈알이 여러 개 달린 짐승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 아가씨도 숲에서 버섯이나 약초 같은 거 캘 생각이라면, 물길 주변만 어슬렁거리다 치우슈. 목숨 버리기 싫으면.”


“엘프들은요? 그쪽 사람들은 짐승들하고 사이가 좋지 않나요?”

소영의 질문에 상인은 콧방귀를 꼈다.


“그 길쭉한 놈들이야 짐승 냄새를 맡고 요리조리 잘 피하겠지. 하지만 그놈들도 숲 한가운데로는 안 들어가. 여기로 장사하러 올 때도 경계림 외곽을 빙 돌아서 온다고. 그나저나 숲은 왜 묻는 거요? 사냥꾼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냥 호기심입니다. 고마워요.”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자리 잡은 오두막은 정말로 인간과 엘프, 양쪽 모두가 접근을 꺼리는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뿔 오소리의 말과 인간들의 인식이 일치했다.


주점을 나와 배낭 구실을 할 거친 마 자루 하나를 사고, 그 안에 빵과 육포를 쑤셔 넣었다.

다음은 의료용품을 구할 차례였다. 시장 골목을 따라 잡화점들을 기웃거리던 소영의 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녀의 시야에 잡힌 것은, 지금까지 곁을 스쳐 지나가던 거친 마직물과 가죽옷을 입은 인간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대장간 앞. 시뻘건 화덕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곳에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인간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어깨는 좁았지만, 몸의 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럽고 곧게 뻗어 있었다. 그들이 입은 옷은 거칠게 짜인 마직물이 아니라, 은은한 녹색과 회색이 섞인, 식물의 잎사귀를 아주 얇게 저며 짜낸 듯한 기묘한 직물이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의 귀였다.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하고 길게 뻗은 귀가 튀어나와 있었다.

엘프였다.


소영은 숨을 멈추고 그들을 관찰했다. 인간들의 시장 한복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의 주변에는 반경 일 미터 정도의 보이지 않는 장막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과의 어깨를 스치는 것을 피하며 걸음을 빙 둘렀다.


엘프들은 대장장이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짐승의 뼈로 만든 바구니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 약초 다발을 꺼내어 건네고, 대신 정교하게 날을 세운 낫 몇 개를 받아 들었다. 그들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땅을 딛는 발소리조차 대장간의 소음에 완전히 먹혀들 정도로 가벼웠다.


소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다시 갈비뼈를 때리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숲 한가운데로는 안 들어간다. 하지만 외곽을 돌아서 왕래한다면, 숲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건 이들일 수 있어.’


오두막을 진료소로 운영하려면 환자가 필요했다. 동물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숲의 거주민인 요정족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안전한 치료소’라는 인식을 심어둔다면, 이 숲에서의 생존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소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 산 가죽 부츠의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앞으로 밀어냈다. 엘프들이 대장간을 떠나 시장을 빠져나가는 골목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소영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잠시만요.”

소영의 목소리가 골목의 소음을 갈랐다. 두 엘프의 걸음이 동시에 멎었다.


가까이서 본 엘프의 눈동자는 기이했다. 홍채의 색이 나뭇잎의 색처럼 옅은 녹색이었고, 동공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투명했다. 그 눈동자가 소영의 낡은 마직물 튜닉과 먼지 묻은 얼굴, 그리고 약간 붉게 달아오른 뺨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광물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인간.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가?”

왼쪽에 선 엘프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거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공명감이 있었다. 발음은 인간의 언어였으나 억양은 새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것처럼 미끄러웠다.


소영은 가슴을 펴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는 인간의 마을에서 온 게 아닙니다. 저는 그 경계림 안쪽, 숲의 중앙에 있는 통나무 오두막에 살고 있습니다.”


두 엘프의 길쭉한 귀가 동시에 미세하게 위로 쫑긋 솟았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 혹은 호기심에 가까운 파동이 스쳤다.


“숲의 중앙? 그곳은 뿌리들이 외부인을 거부하는 땅일 터. 네 몸에서 마나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거짓을 말하는 건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죠. 못 믿겠다면 언제든 찾아와 보셔도 좋습니다. 제가 말을 건 이유는 하나입니다.”


소영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 선언이 그녀의 앞으로의 정체성을 결정지을 것이었다.


“저는 동물들을 치료하는 수의사… 아니, 치유자입니다. 상처 입거나 병든 짐승들을 돌보고 있죠. 그 숲이 외부인을 거부한다지만, 다친 짐승들은 제 오두막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을 고쳐서 다시 숲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엘프들의 투명한 눈동자가 소영의 양손을 향했다. 핏자국은 지워졌지만, 거칠어지고 손톱 밑에 흙물이 든 뭉툭한 손. 그건 확실히 무언가를 부수거나 죽이는 손이 아니라, 흙을 만지고 피를 닦아내는 자의 손이었다.


“당신들은 숲의 경계를 오가며 많은 동물을 마주치겠죠. 혹시 덫에 걸리거나 다쳐서 무리에서 뒤처진 짐승을 본다면, 망설이지 말고 제 오두막으로 데려와 주세요. 숲의 중앙을 향해 걸어오면 간판이 보일 겁니다. 요정족 분들에게도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침묵이 흘렀다. 골목 너머 시장의 시끄러운 소음이 투명한 벽에 막힌 듯 아득하게 들려왔다. 엘프 중 하나가 옆에 선 동료와 시선을 아주 짧게 교환했다. 말소리 없는 의사소통. 그리고 다시 소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물을 치유하는 인간이라. 기이한 인연이군. 숲의 숨결이 너를 품어주었다면, 네가 그곳에 머무는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엘프가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그건 약속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명백한 적대의 철회이자 존재의 인정이었다.


“기억해 두마, 숲의 치유자여. 나무들의 속삭임이 닿는 곳이라면, 네 이야기도 바람을 타고 흐를 것이다.”


엘프들은 소영의 곁을 지나쳐,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 걸음으로 골목 너머를 향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소영은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굳은 듯 서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계의 생명체에게 자신을 어필했다는 사실에,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과 짜릿한 성취감이 동시에 위장을 조였다.


“좋아. 할 일은 했어. 이제 진짜 필요한 걸 사야지.”

태양은 이미 머리 꼭대기를 넘어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숲까지 다시 다섯 시간.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새끼 여우가 혼자 오두막에서 떨고 있을 것이다.


소영은 빠른 걸음으로 시장 안쪽의 약재상과 잡화점을 털기 시작했다.


“가장 독하고 증류를 여러 번 한 술을 주시오. 상처를 닦을 거요.”

“상처를 꿰맬 가장 두껍고 튼튼한 무명실, 그리고 곡선으로 휜 바늘이 필요합니다. 없다고요? 그럼 대장간에서 제일 작고 휘어진 바늘을 구해다 주시오. 웃돈을 얹어주겠소.”

“깨끗하게 삶아서 표백한 붕대용 천을 다섯 마 주시오.”


금화 한 닢을 실버로 바꾸어 흩뿌리자, 물건들이 빠르게 그녀의 마 자루 안으로 쌓여갔다. 알코올을 대체할 독한 증류수 병, 여러 종류의 날카로운 칼, 약초를 으깰 작은 돌절구, 두꺼운 실과 바늘들, 그리고 오두막의 밤을 밝혀줄 두툼한 양초와 기름 램프까지.


짐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무거워졌지만, 마음속의 불안감은 그에 반비례하여 가라앉고 있었다. 이 자루 안의 물건들이 그녀가 그 경계림의 낡은 오두막에서 수의사로서 살아남게 해줄 유일한 무기들이었다.


소영은 무거워진 자루를 어깨에 들쳐 멨다. 새로 산 가죽 부츠의 바닥이 흙길을 단단하게 밟았다. 마을 어귀를 빠져나갈 때, 뒤에서 타오르는 화덕의 연기 냄새가 났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곳은 인간들의 시끌벅적한 소음 속이 아니라, 축축한 흙냄새가 나는 숲 한가운데, 짐승의 발자국이 그려진 낡은 간판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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