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이세계 숲속 동물병원 (9화: 엘프의 방문과 피 흘리는 비늘 사슴)

 주석 냄비 안에서 물이 바글바글 끓어오르며 하얀 증기를 뿜어냈다.


소영은 화덕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방금 전 숲에서 캐온 짙은 보라색 뿌리를 식칼로 썰어 내고 있었다. 칼날이 뿌리의 표면을 파고들 때마다 사각, 하는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끈적한 보랏빛 수액이 도마 대용으로 쓰는 넓은 나무판자 위로 배어 나왔다. 단면은 마치 자색 고구마처럼 촘촘한 전분질로 가득 차 있었으나, 코를 찌르는 향은 알싸한 생강과 매운 무를 섞어 놓은 듯 맵고 자극적이었다.


썰어낸 조각들을 끓는 물 속에 밀어 넣었다. 투명했던 개울물은 금세 탁한 보랏빛으로 물들며 걸쭉해지기 시작했다.


매캐한 장작 타는 냄새 위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이질적인 채소의 향기가 오두막 안을 채웠다. 구석에서 앞발을 핥고 있던 새끼 여우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오더니,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의 냄새를 맡고는 작게 재채기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독은 없어야 할 텐데….”


소영은 나무 국자로 끓는 물을 저으며 중얼거렸다. 수의대 야생동물학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려한 색상의 식물은 알칼로이드 계열의 독성을 품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 숲의 생태계가 지구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어제 마을에서 사 온 보존식은 길어야 사흘 치. 그 안에 숲에서 스스로 열량을 섭취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했다.


국자로 푹 익어 모서리가 둥글게 허물어진 조각 하나를 건져냈다. 입으로 후후 불어 열기를 식혔다. 손가락으로 겉면을 찔러보자 찐 감자처럼 푹신하게 들어갔다.


“일단 조금만 먹어보자.”

소영은 눈을 딱 감고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뿌리를 떼어내 앞니로 씹었다.


혀끝에 닿는 첫 느낌은 퍼석한 탄수화물 특유의 단맛이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씹어 넘기자마자 혀뿌리를 강타하는 아린 맛이 확 퍼져나갔다. 산초나 후추를 씹은 것처럼 구강 점막이 미세하게 마비되는 듯한 감각이었다. 소영은 씹던 것을 삼키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위장으로 내려간 온기가 점막을 태우는지,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뛰는지, 아니면 호흡이 가빠지는지 자신의 생체 신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 분의 시간이 흘렀다. 입안의 얼얼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구토감이나 호흡 곤란 같은 급성 중독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향신료나 소량의 탄수화물 보충제로는 쓸 수 있겠어.’

긴장이 풀리며 그녀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려던 찰나였다.

오두막 밖의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라기에는 기묘했다. 무거운 부츠가 땅을 짓누르는 소리도, 네 발 달린 짐승이 낙엽을 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바람이 낮게 깔리며 잔디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듯한,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규칙적인 마찰음.


새끼 여우가 꼬리를 바닥으로 내리고 목덜미의 털을 바짝 세운 채 문 쪽을 향해 낮게 그르렁거렸다. 적의보다는 극도의 낯섦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였다. 소영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국자를 내려놓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식칼의 자루로 손을 뻗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숨을 죽이고 반쯤 열려 있던 가죽 경첩 문을 조심스럽게 당겨 활짝 열었다.

눈 부신 오전의 햇살 아래, 숲의 녹음을 배경으로 한 인영이 오두막 앞 공터에 서 있었다.


키가 컸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사람의 골격이 아니었다. 어깨는 좁았지만 곧게 뻗은 척추와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가 이질적인 비례를 이루고 있었다. 잎사귀를 엮어 만든 듯한 연녹색의 매끄러운 튜닉, 그리고 은빛이 도는 길게 땋은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 어제 시장에서 마주쳤던 자들과 같은 족속, 엘프였다. 하지만 어제 보았던 이들과는 얼굴의 선이 달랐다. 더 젊고, 턱선이 날카로웠다.


엘프의 옅은 옥색 눈동자가 문가에 선 소영을 정확히 응시했다.

“나무들이 네 이야기를 하더군. 이 아이의 피를 멈춰줄 수 있겠나?”


소리의 울림이 기이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발음하는 물리적인 음성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물방울이 튀는 듯한 청아한 파동이 겹쳐서 들려왔다. 그러나 소영의 시선은 엘프의 비현실적인 외모나 목소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엘프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생명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크기는 중형견만 했다. 사슴을 닮은 매끄러운 황갈색 털을 가지고 있었으나, 네 다리의 관절 부위에는 나무껍질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문제는 그 동물의 오른쪽 옆구리였다. 날카로운 것에 깊게 베인 듯한 십 센티미터가량의 열상에서 검붉은 피가 쿨럭이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엘프의 하얀 손과 연녹색 튜닉 앞자락이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엉망이었다.


혈액의 색깔, 흘러나오는 속도. 정맥 출혈이었다. 당장 멎게 하지 않으면 쇼크사로 이어질 수 있는 출혈량.

“안으로 들어오세요. 당장.”


소영은 식칼에서 손을 떼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길을 텄다. 망설임이나 경외감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계의 조난자가 아니라, 이 오두막의 유일한 외과 의사였다.


엘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였다. 흙바닥에 발을 디뎠음에도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오두막 안을 채우고 있던 매운 뿌리의 냄새와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서 강렬하게 충돌했다. 새끼 여우가 겁에 질려 화덕 뒤의 장작 더미 쪽으로 쏜살같이 몸을 숨겼다.


“저기 건초 더미 위에 눕히세요. 상처 부위가 위로 향하게.”

소영은 곧장 나무 선반으로 돌진했다. 머릿속으로 수술의 프로토콜이 번개처럼 전개되었다. 지혈, 세척, 소독, 봉합.


그녀는 어제 시장에서 사 온 증류주 병의 코르크 마개를 이빨로 물어뜯어 열었다. 깨끗하게 삶아 표백된 무명천 한 마를 칼로 찢어 여러 장의 거즈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판자 사이에 끼워둔 가장 크고 튼튼한 반원형 봉합 침과 두꺼운 무명실을 꺼냈다.


건초 더미에 짐승을 내려놓은 엘프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짐승의 흉곽이 얕고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호흡수 분당 60회 이상. 명백한 쇼크의 징후였다.


“출혈이 심해요. 이 상태에서 술이 닿으면 발버둥을 칠 겁니다. 환자의 머리와 앞다리를 단단히 잡아주세요. 제가 꿰매는 동안 절대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엘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인간이 엘프에게, 그것도 완벽한 통제의 어조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는 아무런 반문 없이 짐승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짐승의 목덜미와 앞다리를 지그시 눌렀다. 힘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도, 짐승의 몸이 보이지 않는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완벽하게 고정되었다.


소영은 건초 더미 옆에 꿇어앉았다.

무명천 거즈를 뭉쳐 상처 부위를 덮고 강하게 압박했다.

“끄으응…!”


짐승의 목구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오며 뒷다리가 허공을 발길질했다. 피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삼 분가량을 압박한 뒤, 거즈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출혈량이 조금 줄어든 틈을 타 상처의 단면을 확인했다. 근육층까지 깊게 찢어졌지만, 다행히 내부 장기는 손상되지 않았다.


“세척합니다.”


그녀는 증류주를 상처 부위에 직접 들이부었다. 투명한 알코올이 찢어진 근육층을 강타하자, 짐승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활처럼 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엘프의 손에 억눌린 상반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코올의 강렬한 휘발성 냄새가 피비린내를 덮으며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소독된 무명천으로 주변의 피와 이물질을 닦아냈다. 단면이 깨끗하게 드러났다.


“바늘 들어갑니다.”


소영은 바늘귀에 굵은 무명실을 꿰고 핀셋 대용으로 쓰는 작은 쇳조각으로 바늘을 잡았다. 첫 번째 바늘땀이 짐승의 질긴 껍질과 근육층을 동시에 파고들었다. 인간이나 지구의 포유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긴 가죽의 저항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손목에 강한 힘을 주어 바늘을 반대편 피부로 밀어 올렸다.


투둑.


살갗이 뚫리는 소리와 함께 피 묻은 바늘이 솟아올랐다. 소영은 실을 당겨 첫 번째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벌어져 있던 피부의 양 끝이 강제로 맞닿으며 핏줄기가 막혔다.


두 땀, 세 땀, 네 땀.


소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맺혔지만, 그녀의 눈도 손도 오직 짐승의 상처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완벽한 몰입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계의 괴물도, 엘프의 마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파괴된 조직과, 그것을 물리적으로 꿰매어 생명을 붙잡아두는 봉합의 역학만이 오두막 안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바늘땀을 떠서 매듭을 지었다.


상처는 지네가 기어가는 듯한 투박한 봉합 자국을 남긴 채 완전히 닫혔다. 그녀는 칼로 실을 끊어냈다. 완전히 말려 가루가 된 야생 쑥 한 줌을 돌절구에 넣어 빻은 뒤, 소량의 물과 섞어 반죽을 만들어 봉합 부위 위에 두껍게 발랐다. 항균과 진정 효과를 기대한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깨끗한 무명천을 넓게 둘러 짐승의 복부 전체를 단단히 감싸 붕대를 고정했다.


“끝났습니다. 이제 손 놓으셔도 돼요.”

소영이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내며 뒤로 주저앉았다. 손은 피투성이였고, 양 무릎의 청바지 천도 바닥의 흙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엘프가 천천히 손을 떼고 일어섰다. 엘프의 옥색 눈동자가 피가 멎고 규칙적인 호흡을 되찾은 짐승의 복부를 응시하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는 소영에게로 옮겨갔다.


“기이한 재주군.”

엘프의 목소리가 좁은 오두막 안을 조용히 울렸다.


“숲의 뿌리나 잎사귀에 깃든 생명력을 빌려 상처를 덮는 것은 보았으나, 이렇게 파괴된 육신을 실과 쇠로 직접 얽어매어 억지로 시간을 묶어두는 방식은 처음 본다. 아주 조잡하고… 위태로우나, 확실히 생명을 붙잡아두었군.”


“외과 수술이라고 합니다.”

소영은 무릎에 놓여 있던 천 조각으로 손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대답했다.


“망가진 파이프를 고무테이프로 막는 것과 같은 원리죠. 마법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물리적으로 피가 새어나가지 않게 막고, 이 아이의 몸이 스스로 살을 붙일 때까지 벌어지지 않게 고정해 둔 것뿐이에요. 이대로 열흘 정도 무리하게 걷지 않고 안정을 취하면 살 수 있습니다.”


엘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길게 땋은 은빛 머리카락이 튜닉의 어깨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인간들은 나무를 베고 쇠를 불리는 것만 할 줄 아는 줄 알았지. 숲의 경계에 똬리를 튼 너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으나, 동족들의 말대로 이곳은 단순한 침략자의 진지가 아니었군.”


엘프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한 나뭇잎에 싸인, 엄지손가락만 한 푸른색 열매 세 개였다. 엘프가 그것을 나무판자 위에 올려놓았다. 열매에서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같은 맑고 청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달빛을 머금은 '이슬 자두’다. 네가 사용한 독한 물(증류주)과 실의 값어치는 될 거다. 열을 내리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 쓰이지. 피를 흘린 이 짐승의 열이 오르거든 즙을 내어 먹여라. 네가 수고했으니 하나쯤은 네가 취해도 좋다.”

“고맙습니다.”


소영이 열매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처음 마을에서 엘프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뿌렸던 씨앗이, 환자라는 결과와 열매라는 보상으로 완벽하게 수확된 것이다.


“이 숲에 다친 짐승들이 많습니까?”


소영이 물었다. 그녀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식칼과 봉합 바늘을 씻어내기 위해 물을 뜨며 등 너머로 질문을 던졌다.


“밤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엘프의 대답에는 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여러 개 가진 것들의 활동이 잦아졌어. 경계림 깊은 곳에서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지. 그 포식자들을 피하려다 다치거나 영역에서 밀려난 짐승들이 많다.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이 간판 아래로 생명들을 인도하지. 네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엘프의 시선이 오두막 밖, 미세하게 흔들리는 '동물병원’의 나무 간판을 향했다.


“감당해야죠.”

소영은 피가 씻겨 내려간 바늘을 천에 닦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게 제가 여기서 살아남기로 한 방식이니까요.”


엘프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아주 미세한 표정의 변화였다. 엘프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 고요한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연녹색의 뒷모습이 수관의 그림자 사이로 섞여 들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두막 안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화덕의 불씨가 타닥거리며 튀어 오르는 소리와, 건초 더미 위에서 규칙적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 비늘 사슴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장작 더미 뒤에 숨어 있던 새끼 여우가 슬그머니 기어 나와 낯선 짐승의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벌름거렸다.


소영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천장의 통나무 들보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보라색 뿌리의 아린 맛과, 피 냄새, 그리고 이슬 자두의 청량한 향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환자가 늘었다.’


입원 환자 두 명. 보호자는 이계의 짐승과 엘프. 그리고 오두막 주변의 숲은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배회하는 영역.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상황의 한가운데서, 역설적으로 그녀의 존재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져 있었다.



🏥 현재 진료소 상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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