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이세계 숲속 동물병원 (13화: 푹신한 양털 침구와 고기 스튜, 그리고 다가오는 거대한 그림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중력의 부재였다.


아니, 중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몸을 짓누르던 바닥의 강도가 달라진 탓이었다. 어제까지 소영의 등과 어깨, 골반뼈를 가차 없이 찔러대던 차갑고 단단한 흙바닥과 거친 건초 더미의 질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체중이 실리는 모든 곡선을 따라 두툼하게 채워진 양털이 푹신하게 내려앉으며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겉을 감싼 캔버스 천은 약간 뻣뻣했지만, 흙먼지가 피부에 들러붙는 불쾌함과는 차원이 다른, 깨끗하게 세탁된 직물 특유의 건조한 마찰감이었다.


소영은 눈을 감은 채로 팔다리를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척추 마디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지만, 찌르르하게 울리던 관절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오두막의 틈새로 들이치는 빛의 각도를 보아하니 이미 해가 중천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수호석의 결계가 만들어낸 완벽한 정적이 오두막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조차 얇은 막에 걸러진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왔다.


옆구리 부근에서 기분 좋은 온기가 꿈틀거렸다. 새끼 여우가 침구의 끝자락에 몸을 둥글게 만 채, 코를 꼬리 밑에 파묻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녀석 역시 흙바닥보다 양털의 푹신함이 마음에 든 것이 분명했다.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소영이 여우의 붉은 털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어주자, 녀석이 길게 하품을 하며 네 다리를 쭉 뻗었다.


소영은 침구에서 몸을 일으켜 부츠를 꿰어 신었다. 며칠 전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던 가장 본능적인 욕망, 즉 '제대로 된 식사’를 실현할 때였다. 어제 시장에서 은화를 털어 사 온 짐 자루를 풀어 헤쳤다.


화덕에 마른 잔가지를 밀어 넣고 부싯돌을 쳐 불씨를 살렸다. 불꽃이 장작을 핥으며 주황색 빛을 토해내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냄비를 들고 문밖으로 나섰다. 결계 안쪽의 개울물은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냄비에 차가운 물을 절반쯤 채워 들고 돌아와 화덕 위에 올렸다.


“자, 어디 보자.”


새로 산 묵직한 무쇠 식칼과, 작은 돌절구를 도마 대용 나무판자 옆에 끌어다 놓았다.


가장 먼저 며칠 전 숲에서 캐온, 그 혀를 얼얼하게 마비시키던 보라색 뿌리를 꺼냈다. 껍질을 얇게 벗겨내자 진득한 수액이 배어 나왔다. 칼날을 직각으로 세워 뿌리를 아주 잘게 다지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묵직한 무쇠 칼이 나무판자와 부딪히는 경쾌한 파열음이 오두막을 울렸다. 잘게 다진 뿌리 조각들을 끓어오르는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은 순식간에 탁한 보랏빛으로 변했다.


다음은 육포였다. 질기고 딱딱한 고깃덩어리를 칼끝으로 힘겹게 저며 얇은 편으로 만들었다. 고기 조각들도 냄비 안으로 직행했다.


여기까지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조리법이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소영은 가죽 쌈지에서 마늘 냄새가 나는 마른 식물 뿌리와, 후추와 비슷한 매캐한 향을 내는 검은 열매를 꺼냈다. 돌절구 안에 그것들을 집어넣고 공이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찌직, 빠직.


말라 있던 식물의 조직이 부서지며, 코를 찌르는 알싸하고 폭발적인 향신료의 냄새가 공기 중으로 확 퍼져 나갔다. 눈이 약간 시큰거릴 정도로 자극적인 향이었다. 그녀는 빻아낸 가루를 나무 국자로 긁어모아 끓는 냄비 안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어제 시장에서 샀던 굵은 가루 소금을 두 꼬집 집어 손가락 사이로 비비며 스튜 위에 흩뿌렸다.


냄비 안에서 끓어오르는 수증기의 성질이 완전히 변했다. 짐승의 피와 풀 비린내가 뒤섞인 이질적인 냄새가 아니라, 서울의 어느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맡을 수 있을 법한, 완벽하게 통제되고 조율된 향신료와 고깃국물의 냄새였다.


구석에서 지켜보던 새끼 여우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앞발로 자신의 코를 감쌌다.


(매워. 코 아파, 눈물 나.)


여우의 머릿속 파동이 불평을 쏟아냈다. 소영은 픽 웃으며 여우의 몫으로 줄 고기 몇 점을 미리 건져내 찬물에 담가 매운 기운을 씻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몫을 나무 국자로 듬뿍 퍼서 후후 불었다.


걸쭉한 보랏빛 국물과 푹 익은 뿌리 조각, 그리고 흐물흐물해진 육포 조각이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으음—!”


소영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소금이었다. 그저 나트륨 몇 그램이 추가되었을 뿐인데, 재료들이 가지고 있던 감칠맛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어 미뢰를 강타했다. 마늘과 후추를 닮은 향신료가 육포 특유의 역겨운 누린내를 완벽하게 잡아채어 깊은 풍미로 바꾸어 놓았고, 보라색 뿌리의 아린 맛조차 기분 좋은 매콤함으로 중화되어 있었다.


“소금이랑 후추가 들어가니까 이제야 사람 먹는 밥 같네.”


혼잣말이 젖은 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녀는 국자를 내려놓고 아예 냄비의 손잡이를 헝겊으로 쥔 채 입을 대고 국물을 마셨다. 뜨거운 열기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쏟아져 내리며, 온몸의 혈관이 확장되는 것이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고 콧물이 핑 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위장이 칼로리와 나트륨으로 팽창하며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충족감. 그건 단순한 허기의 해소를 넘어, 낯선 생태계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문화적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심리적 승리감이기도 했다.


여우 역시 물에 헹군 고기 조각들을 허겁지겁 씹어 삼키고 있었다. 뼈가 붙은 이후로 녀석의 식욕은 겉잡을 수 없이 왕성해져 있었다.


냄비 바닥을 싹싹 긁어먹은 뒤, 소영은 부른 배를 안고 침구 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엘프의 수호석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장막 덕분에 오두막 안은 완벽한 요새였다. 그 평화로운 감각 속에서 오후의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조용하고 무해하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소영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식량, 수면, 안전)이 완벽히 채워지자, 인간 특유의 본성—환경을 개조하고 통제하려는 욕구—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자, 병원을 샀으면 인테리어를 해야지.”


그녀는 어제 샀던 묵직한 쇠톱과 망치, 그리고 굵은 쇠못 한 줌이 든 가죽 주머니를 챙겨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목표는 '입원실’의 제작이었다. 비늘 사슴의 경우 얌전한 초식동물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상처 입은 육식동물이나 투쟁심이 강한 마수가 치료를 받으러 온다면 맨바닥에 뉘어놓는 것만으로는 그녀와 여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환자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회복을 강제할 수 있는 물리적인 격리 공간, 즉 간이 케이지가 필수적이었다.


소영은 수호석의 결계 경계선 부근을 돌며 목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거목을 베어낼 힘은 없었지만, 숲에는 벼락을 맞거나 수명을 다해 쓰러진 단단한 마른 나뭇가지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사람 팔뚝 굵기의 곧고 튼튼한 나무토막들을 골라 오두막 앞 공터로 끌어모았다.


도마로 쓰던 넓은 나무판자 위에 굵은 나뭇가지를 올리고 쇠톱의 날을 들이댔다.


서걱, 사각, 쓱, 싹.


철과 나무가 마찰하는 거칠고 규칙적인 파열음이 공터를 울렸다. 소영의 오른팔 근육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이계의 나무는 지구의 나무보다 섬유질이 질기고 조밀하여 톱날이 자꾸만 중간에 턱턱 걸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체중을 실어 톱을 밀고 당겼다.


톱밥이 노란 눈처럼 흩날려 부츠 위로 소복하게 쌓였고, 잘려 나간 나무의 단면에서는 송진과 비슷한 맵싸한 수액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후우, 진짜 덥네.”


몇 개의 기둥을 자르고 나자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녀는 튜닉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무토막들을 직사각형 형태로 짜맞추기 시작했다. 기둥과 기둥이 만나는 교차점에 굵은 쇠못을 대고 망치로 강하게 내리쳤다.


깡! 까앙!


금속성의 둔탁한 타격음이 결계 안쪽의 공기를 찢었다. 못이 나무의 섬유질을 파고들며 뼈대를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역시 도구가 있으니까 일이 수월하네.”


소영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점차 틀을 갖춰가는 가로 1미터, 세로 1.5미터 남짓한 목재 우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쇠못이 들어간 자리가 삐뚤빼뚤하고 나뭇가지의 굵기가 제각각이라 모양새는 엉성했지만, 적어도 발로 걷어찼을 때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내구성은 갖추었다. 바닥에 마른 건초를 깔면 훌륭한 회복용 격리 병상이 될 터였다.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케이지의 앞면 창살 역할을 할 얇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썰고 있을 때였다.


끼이잉—.


오두막 그늘에서 배를 깔고 자고 있던 새끼 여우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소영의 톱질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청각은 톱질 소리와 망치 소리로 가득 차 있어 주변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여우의 감각 기관은 결계 밖에서 벌어지는 무언가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여우의 귀가 뒤로 바짝 젖혀졌고, 앞다리가 땅을 긴장감 있게 짚고 있었다.


“어라? 새로운 환자가 찾아왔나?”


소영은 톱을 나무판자 위에 내려놓고,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뼈칼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엘프의 수호석은 악의를 가진 포식자의 접근을 차단하고 오두막을 투명하게 은폐하는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상처 입고 도움을 청하려는’ 존재들에게는 그 결계의 문턱이 열려 있을 거라 엘프가 말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다가오는 것은 사냥꾼이 아니라 환자일 확률이 높았다.


소영의 시선이 수호석의 투명한 막이 쳐져 있는 숲의 경계 쪽을 향했다.


울창한 양치식물 군락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하게 흙바닥을 끄는 소리.


스윽, 쿵. 스윽, 쿵.


정상적인 네 발 짐승의 보행 리듬이 아니었다. 한쪽 다리, 혹은 신체의 일부가 완전히 마비되거나 절단되어 땅에 질질 끌리며 전진하는 소리였다. 거친 쇳소리가 섞인 헐떡이는 숨소리가 결계의 경계를 넘어 공터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영은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다가오는 그림자의 부피가, 며칠 전 치료했던 비늘 사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 13화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표지를 제작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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