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이세계 숲속 동물병원 (18화: 엘프의 마취약을 대체할 수액 채집, 그리고 미지의 포식자와의 추격전)

 빈 수정 유리병의 바닥을 때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영은 오두막의 선반 앞에 서서, 엘프가 주고 갔던 원래의 마취액 병과, 어제 마을에서 사 온 주둥이가 넓은 빈 유리병 하나를 챙겨 가죽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에 단단히 찔러 넣었다. 병끼리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무명천을 찢어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른쪽 허벅지에는 무지갯빛이 감도는 예리한 뼈칼이 매달려 있었고, 어깨에는 채집물을 담을 낡은 마 자루가 걸쳐져 있었다.


오두막의 가죽 경첩 문을 열고 나서자, 공터 중앙의 나무 우리 안에서 그림자 갈기 늑대가 엎드린 채 황금색 눈동자로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배를 채운 짐승은 어제처럼 난폭하게 굴지 않고, 붕대를 감은 어깨를 바닥에 기댄 채 묵직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얌전히 집 지키고 있어.”

소영은 늑대에게 짧게 지시하듯 내뱉고는, 발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새끼 여우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가자.”


여우는 신이 난 듯 앞발로 바닥을 탁탁 치더니, 부목을 뗐던 오른쪽 앞다리로도 가볍게 지면을 차고 오르며 수호석의 경계선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완벽한 재활의 증명이었다. 소영은 여우의 뒤를 따라 흙바닥을 밟았다.


수호석의 반경 30미터 경계면. 그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기의 장막을 통과하는 순간, 완벽하게 통제되었던 무균실의 정적이 박살 나며 경계림의 압도적인 소음과 습기가 폐부를 훅 치고 들어왔다.


머리 위를 덮은 거대한 수관 때문에 태양 빛은 짙은 초록색으로 걸러져 산란하고 있었다. 썩은 부엽토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부츠 밑창에 쩍쩍 달라붙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숲 전체를 울렸다.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냄새야.”

그녀는 코끝을 스치는 숲의 수만 가지 악취 속에서, 자신이 찾아야 할 단 하나의 명확한 타깃을 떠올렸다.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무거운… 수면제 같은 냄새. 틀림없이 근처에 원재료가 되는 식물이나 수액이 있을 거야.”

소영이 중얼거리며 새끼 여우를 내려다보았다.


“여우야, 네 코가 필요해. 오두막에서 맡았던 그 투명한 물 냄새, 기억하지?”


여우는 귀를 뒤로 젖히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알아. 코 막히는 달콤한 냄새. 벌레도 피하는 냄새.)


텔레파시를 통한 파동이 소영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벌레도 피하는 냄새. 식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뿜어내는 알칼로이드 계열의 강력한 독성이나 마취 성분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물학적인 추론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여우는 코를 땅에 박을 듯이 낮추고 지그재그로 숲을 훑기 시작했다. 소영은 뼈칼의 자루에 손을 얹은 채, 여우의 붉은 꼬리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덤불을 헤쳤다.


이계의 숲은 인간의 보행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였다. 무릎 높이까지 자라난 가시 달린 양치식물들이 튜닉의 밑단을 긁어댔고, 사람 허리 굵기만 한 거대한 칡넝쿨들이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발목을 노렸다. 소영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쳐내며, 여우가 파놓은 길을 따라 몸을 웅크리고 기어가듯 전진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지형이 점차 가파른 내리막으로 변하더니, 바닥이 축축한 이끼로 덮인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계곡의 바닥으로는 물이 흐르지 않았지만, 짙은 안개가 무릎 높이로 깔려 있어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여우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녀석은 공기 중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작게 재채기를 하며 앞발로 자신의 코를 문질렀다.


(…여기서부터 나. 냄새 짙어. 머리 무거워져.)


여우의 파동에 몽롱함이 섞여 있었다.


소영 역시 그 변화를 신체로 체감하기 시작했다. 골짜기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호흡을 할 때마다 달큼하고 끈적한 향기가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단순히 코로 맡는 냄새가 아니라, 폐포 점막에 들러붙어 혈관으로 직접 스며드는 기화된 화학물질에 가까웠다.


눈꺼풀이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고, 귓가에서 뛰던 심장 박동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정신 차려야 해. 여기서 잠들면 끝장이야.”


소영은 주머니에서 수통을 꺼내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뺨을 가볍게 때려 스스로를 각성시켰다. 여우에게도 손에 물을 덜어 코 주변을 씻어주었다. 각성 효과가 크진 않았지만 기분 전환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골짜기 바닥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하게 쓰러진 썩은 참나무 기둥 위에서 이질적인 흔적을 발견했다.


참나무의 껍질을 뚫고 자라난 기괴한 형태의 식물 군락이었다. 잎사귀는 창백한 회백색이었고, 그 중심에는 부풀어 오른 심장이나 커다란 버섯의 갓을 연상케 하는 반투명한 구근(구근)들이 매달려 있었다. 구근의 표면에서는 미세한 형광빛이 맥박 치듯 점멸하고 있었고, 그 표면의 미세한 구멍들 사이로 꿀처럼 끈적하고 투명한 수액이 맺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공기 중을 지배하던 그 지독한 수면제의 냄새가 바로 저 수액에서 증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찾았다.”


소영은 조심스럽게 썩은 참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구근 식물 군락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런데 식물들의 형태를 유심히 살피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연적으로 자라난 군락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구근 몇 개의 줄기 부분이 아주 날카롭고 매끄러운 단면으로 잘려 나가 있었다. 짐승이 이빨로 뜯어 먹은 거칠고 짓이겨진 흔적이 아니었다. 예리한 칼날, 그것도 섬유질의 저항을 완전히 무시하는 극도의 절삭력을 가진 도구에 의해 '수확’된 흔적.


“엘프들이 다녀갔던 자리구나.”


소영은 자신이 올바른 식물을 찾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엘프들이 수호석을 박아주며 가져다주었던 그 마취액 병은, 바로 이 골짜기의 창백한 구근에서 짜낸 수액을 가공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뼈칼을 뽑아 들었다.


이질적인 식물을 채취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다. 수액이 피부에 직접 닿았을 때 알레르기 반응이나 급성 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 소영은 무명천 조각으로 자신의 왼손을 단단히 감싸 간이 장갑을 만들었다. 오른손에는 뼈칼을 쥐고, 가장 크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구근 하나를 겨냥했다.


구근의 아래쪽, 회백색 줄기가 이어지는 부위에 칼끝을 댔다.


스윽.


엘프의 뼈칼은 섬유질의 저항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단단해 보이던 줄기가 칼날이 닿자마자 물에 젖은 종이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절단면에서 투명하고 끈적한 수액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소영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챙겨 온 빈 유리병을 꺼내어, 떨어지는 수액의 줄기 아래에 병의 주둥이를 갖다 대었다.


투명한 점액질이 묵직하게 병 바닥으로 떨어져 쌓였다. 가까이서 맡은 수액의 냄새는 공기 중의 냄새보다 수십 배는 더 짙고 독했다. 소영은 숨을 얕게 쉬며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작업에 집중했다. 수액을 받아내는 동안, 무명천을 감싼 왼손의 손가락 끝으로 수액이 한두 방울 스며들어 피부에 닿았다.


닿은 부위의 감각이 일순간에 지워졌다.


얼음을 대고 있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지더니, 이내 손가락 끝에 바늘을 찔러도 모를 완벽한 국소 마취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효과 한 번 지독하네.”


소영은 입술을 깨물며 유리병이 절반쯤 찰 때까지 수액을 받아냈다. 세 개의 구근을 잘라내어 즙을 짜내자, 넉넉하게 쓸 수 있는 양의 마취용 수액이 모였다. 엘프들처럼 정제하는 법은 모르지만, 이 원액에 물이나 알코올을 희석하여 점도를 맞추면 상처에 펴 바르는 국소 마취제로는 완벽하게 기능할 터였다.


그녀는 병의 코르크 마개를 꽉 닫아 밀봉하고, 주머니에 다시 안전하게 집어넣었다.


채집을 마친 구근의 껍질 부분도 버리지 않고 챙겼다. 찧어서 상처에 붙이거나 태워서 연기를 내면 또 다른 용도가 있을지 몰랐다.


“여우야, 다 끝났어. 이제 돌아가….”

소영이 채집한 물건들을 마 자루에 챙겨 넣으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크르르르르—.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 골짜기의 안개를 응시하며 망을 보던 새끼 여우의 목구멍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여우의 등줄기 털이 빳빳하게 곤두서 있었고, 시선은 골짜기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의 더 깊은 심연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무거운 발소리 와. 냄새 없는 것. 아주 큰 거!)


여우의 텔레파시 파동이 비명처럼 소영의 고막을 때렸다. 냄새가 없는 거대한 발소리.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풍하측(바람의 아래쪽)을 타고 접근하며 자신의 체취를 완벽하게 지운 채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골짜기의 짙은 안개 너머에서, 나뭇가지가 둔탁하게 꺾이는 소리가 우직 하고 울렸다.


소영의 혈관을 타고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마취향에 취해 몽롱했던 뇌가 단숨에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명료해졌다.


“도망친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마 자루를 둘러메고, 뼈칼을 허리춤에 꽂아 넣은 뒤 여우가 서 있는 언덕 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축축한 이끼에 미끄러져 무릎이 꺾일 뻔했지만, 양손으로 진흙을 움켜쥐고 기어오르듯 언덕을 돌파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확인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계의 숲에서 호기심은 곧 사망 선고였다.


그녀는 자신이 걸어오며 남겼던 냄새의 궤적을 역추적하며, 가시덤불을 뚫고 짐승처럼 숲을 가로질렀다. 거친 나뭇가지가 뺨을 때리고 튜닉을 찢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여우가 앞장서서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흉곽을 부술 듯이 요동칠 무렵, 그녀의 시야 끝에 다시금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수호석이 뿜어내는 미세한 은빛 점멸, 그리고 공터에 세워진 거대한 나무 우리와 오두막.


퍼엉—.


보이지 않는 결계의 장막을 온몸으로 뚫고 들어오는 순간, 숲의 압도적인 살기와 추격자의 거친 소음이 거짓말처럼 툭 끊어졌다. 진공 상태의 고요함이 다시 그녀를 감쌌다.


소영은 공터의 흙바닥 위로 무릎을 꿇고 고꾸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이 눈을 찌르는 것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여우 역시 그녀의 옆에 엎드려 헥헥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계 밖의 숲 가장자리 양치식물 군락이 거칠게 흔들렸다.


소영은 바닥에 엎드린 채 그쪽을 주시했다. 수호석의 은폐 마법 때문에 추격자는 오두막과 소영의 존재를 시각적, 후각적으로 완벽하게 놓친 상태였다. 잠시 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씩씩거리는 거친 콧김을 뿜어내더니, 방향을 틀어 다시 숲의 깊은 곳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살았네.”


소영은 뒤로 대자로 드러누웠다. 결계 안의 평화로운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실성한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차가운 유리병의 촉감을 확인했다. 병 안에는 숲의 무자비한 생태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직접 캐낸 전리품—투명하고 점성 높은 수면 수액—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엘프의 보급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이계의 약재 조달망을 뚫어낸 것이다.


“이거면… 당분간 마취약 걱정은 없겠어.”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병을 안전한 선반에 올려두고, 묻은 흙을 대충 털어냈다. 야외 병상의 늑대는 이 소란 속에서도 태평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결계라는 무적의 방패가 있는 한, 그녀의 진료소는 완벽한 성역이었다.


“이제 약도 넉넉해졌으니까… 제발 평범한 동물이 환자로 오면 좋겠는데.”


소영은 화덕에 불을 지피며 허탈하게 웃었다. 목숨을 건 채집으로 한 단계 레벨 업한 이계의 수의사. 그녀의 영토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숲의 심연을 향해 그 뿌리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 현재 진료소 상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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